평범한 사람들은 모를 특수한 고통을 겪고 그것을 딛고 일어나 남들보다 특출나게 성공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성공신화가 누군가에게 가능하다고 해서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 아니듯이 특별한 고통을 겪었다고 해서 특별한 성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한 특별한 성공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달라. 라는 문장에는 아픔이 서려져 있다. 나는 다르다는 소외감 그 아픔이 때로 견디기 힘들어서 우리의 뇌는 마치 그 자체가 좋은 것인 양 포장해버리기도 한다. 남과 다른 것, 특별한 것 '나는 이런 특별한 고통을 겪은 사람이야.' 아픔이 이상한 자부심이 되어간다면 상처가 곪고 있다는 신호다.
넘어졌으면 그냥 흙먼지 털고 일어나면 되는 것인데 넘어졌던 만큼 더 잘 걷고 빨리 뛰고 남들보다 앞질러 가야 한다고 나를 다그치게 된다.
남들보다 성공해야 해 세상에 복수해야 해 보란 듯이 잘 살 거야 라는 마음은 사실 아픈 나를 향한 2차적 가해다.
특별한 고통에 대처하는 법은 특별한 성공을 이루어 내는 게 아니라 그만큼 특별한 위로를 해 주는 것뿐이다.
나는 아픈 마음의 나를 충분히 위로해 준 적이 있던가?
추락 한 만큼 튀어 오르기만을 바라고 있다면 그건 추락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뜻이다. 고통의 쓸모와 의미를 찾고 좋은 것의 복선 따위로 아픔을 희석하려는 것은 나에 대한 아픔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신기하지 않은가? 우리는 타인이 넘어진 것을 봤을 때는 위로를 생략하지 않는다. '괜찮아? 다친데 없어?'라는 말이 저절로 당연하게 나오는데 우리는 스스로가 넘어졌을 때 너무 쉽게 위로를 생략해버린다. 아프다. 고통스럽다. 쪽팔린다. 싫다는 감각에서 바로,
왜 넘어졌지? 다음엔 넘어지지 말아야지 아 또 나만 늦겠네, 빨리 일어나야 해 따위의 말들이 나온다. '아팠겠다.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 몸 괜찮아? 천천히 가자.'라는 다정한 말을 나 자신에게는 절대 해본 적이 없으니까.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이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그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사회에 딱 맞게 소속되지 못해 남들과는 달라서 오는 아픔을 남들과는 달라서 이룬 성공으로 바꿔치기하려고 했던 것 같다.
또 소름인 점은 남들과 다른 나에게 남들보다 특별한 ‘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미운 오리 새끼에게 “너는 왜 우리랑 달라?”
라고 말한 오리는 있었을지언정, “너도 우리처럼 되어야 해”
라고 강요했던 오리는 아마 없었으리라.
내가 위기 심리상담사 자격증 과정을 공부하며 배웠던 것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트라우마를 겪거나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힘든 위기를 경험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 중 하나는 뭔가 기적적인 일이 생겨 모든 문제가 해결되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사실 당연하다. 누군가가 죽으면 그 사람이 살아돌아오길 바라고 사기를 당하면 순순히 돈을 돌려주길 바라고 물에 빠지면 누군가 구해주길 바라게 되는 것이.
우리는 때로 기적을 바라게 된다. 현실이 가혹할 때일수록 더더욱.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에게 아파서 목놓아 울고 애도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면 그건 나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나 자신에게 따뜻하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없다.
미운 오리 새끼는 사실 백조였다는 우화는 감동적이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사실은 오리보다 백조가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운 오리 새끼는 백조가 아닐 수도 있다. 참새일 수도, 닭일 수도, 까치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남들과 달라도 괜찮다는 것이고 나와 비슷한 무리가 어딘가에는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