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인생이 내 인생이던 시절이 있었다. 너무 오래. 엄마가 아프면 내가 아팠고 엄마가 기쁘면 내가 기뻤다. 우리는 하나였다. 아니, 하나였을까?
사람은 사람을 너무 사랑하면 그 사람이 전부가 되어버린다. 주체와 자아가 사라지는 것처럼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내 전체, 전부가 된다. 하지만 그런 느낌이 든다고 해서 정말 그렇게 되는 걸까? 사랑이 우리를 그 대상에 녹아들어 사라지게 만들었다면 인류는 진작에 멸종했어야 한다. 때때로 하나인 것처럼 느껴지는 우리는 때때로 너무 가까이 있어 오히려 상처를 주기도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도 당연히 원하겠지 내가 싫으니까 상대도 당연히 싫겠지 상식 선에서는 배려가 될 수도 있는 생각들이 취향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침해가 된다. 넌 왜 이걸 좋아해? 넌 왜 이렇게 안 해? 잔소리는 참견이 되고 넌 왜 이렇게 살아? 변질된 사랑은 결국 폭력이 되고야 만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옛 드라마 명대사처럼
상대의 기쁨이나 아픔에 공감해 주는 것은 분명 사랑이 하는 일이다. 하지만 상대의 삶이나 감정을 넘겨짚고 내 기준으로 판단해버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상대가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조언을 해주는 것은 나의 무례함만 드러낼 뿐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무의식적인 폭력들이 너무 많다. 가까운 연인이든 친구든 가족이든 심지어 자기 자신이든 우리는 때로 너무 가까이 있는 존재에게 본의 아니게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철이 없었던 시절 아낌없이 내어주기만 하는 엄마가 너무 착하다는 이유로 답답하고 불편해 못마땅하다는 티를 팍팍 낸 적이 있다. 엄마가 조금만 더 이기적이었으면 좋을 텐데 자식을 위해 덜 희생하면 참 좋을 텐데 라는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이제 와 자세히 보면 나의 그 틱틱대는 마음은 엄마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 아닌 그 큰 사랑을 내가 어떻게 다 갚나 하는
두려움에서 오는 불편함이었다는 게 보인다. 하지만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아낌없이 내어준 사람에게 성을 내는 것은
정말 잘못한 일이었다. 고맙게 받으면 될 것을 나도 있는 힘껏 다시 사랑해 주면 될 것을
매 순간 걱정을 해준다고 해서 사랑을 잘하고 있는 건 아니다 매 순간 필요 없는 걱정을 해주는 것은 매 순간 나의 욕심에 사로잡혀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안다. 엄마는 엄마의 인생이 있고 엄마의 선택들이 있다. 존중받아야 마땅할. 우리는 결코 하나가 아니다.
우리는 둘이다. 아무리 이전에 한 몸이었고 내가 엄마의 뱃속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태어난 순간 나의 인생은 시작된다. 사실 둘이 되었기 때문에 사랑도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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